Nathan Park 기자의 시사분석 - 시카고의 핵무기 금지법
시카고에 핵무기를 금지하는 법이 있다는 것을 아는 주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연방법도 아니고 시 조례안으로 핵무기를 금지한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핵무기의 생산과 보관, 거래를 금지하는 시카고 조례안은 정식 절차를 거쳐 시의회에서 통과된 후 시장의 서명을 받아 발효됐고 현재도 존재한다. 만약 이를 어길 시 1000달러의 벌금에 처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이면에는 핵무기 확산 경쟁을 벌이던 1980년대 당시 상황과 핵무기 개발과 연관된 시카고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흥행에도 성공한 유명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시카고는 미국 정부의 핵무기 개발 역사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도시다. 엔리코 페르미를 주축으로 한 시카고대학의 과학자들이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중이던 1942년 12월 2일 캠퍼스 내에서 인류 최초의 통제된 핵 연쇄 반응 실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론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인류 역사에서 핵폭탄과 핵발전소 등이 등장할 수 있었다. 시카고 대학에서의 실험이 성공하자 이를 기반으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맨하탄 프로젝트가 시작될 수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키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던 핵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질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시카고 대학의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인 흔적은 지금도 시카고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시카고 대학 캠퍼스에 설치된 핵 연쇄 반응 실험 성공 조각상이다. 조각상은 핵연쇄 반응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난지 25년이 되는 1967년 12월 2일 시카고 대학 도서관 옆에 세워졌다. 또 실험에 쓰였던 원자로도 시카고 서버브 지역으로 이전돼 매장되어 있을만큼 핵 개발과 시카고는 연관성이 깊다. 국립아르곤연구소에서는 원자력 관련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세계는 냉전 시대로 접어들면서 미소간 핵무기 경쟁이 치열해졌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재임 당시에도 이런 추세는 이어졌다. 레이건 대통령은 전임 카터 대통령이 마련한 핵무기 관련 조약도 반대했다. 또 1982년 연방 의회에서 통과시킨 핵무기 동결 결의안도 무시한 채 소련과의 핵무기 경쟁을 이어갔다. 그래서 핵무기 반대론자들은 각 지방자치단체별로 핵무기 금지법을 추진했다. 연방 정부 차원에서 금지법을 추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자명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취했던, 일종의 차선책이었던 셈이다. 지방자치단체별로 핵무기 금지법을 통과시키는 것은 연방 의회보다 쉬웠으며 더욱 많은 지자체들이 참여해 일반 시민들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도 있다는 점도 고려 대상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1982년 핵무기 확장에 반대하던 시카고 주민 2만명이 다운타운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하면서 당시 상황을 대변했다. 이어 1986년 시카고 시의회는 핵무기 금지 조례안을 상정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전국적으로 100여개의 도시에서 핵무기 금지 법안을 승인했다. 이 중에는 뉴저지주의 저지 시티와 같이 인구 23만명의 주요 도시도 포함됐고 매사추세츠주의 게이 헤드와 같이 고작 인구 220명의 소도시도 참여했다. 시카고는 이 중 가장 큰 대도시로 이름을 올렸다. 더욱 눈길을 끌었던 것은 당시 시카고 시장과 시의회가 치열한 권력 다툼을 하고 있었을 때라는 점이다. 당시 시카고 시장은 최초의 흑인이었던 해롤드 워싱턴. 하지만 시의회는 에드 브도이락 시의원이 이끄는 백인이 다수계를 차지하고 있었다. 브도이락 시의원이 대표하는 백인 시의원들은 워싱턴 시장의 모든 제안과 조례안을 거부하고 일종의 권력 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를 ‘시의회 전쟁’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단 핵무기 금지법은 예외였다. 워싱턴 시장이 취임한 후 시의회에서 처음으로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법이 바로 핵무기 금지법이었다. 그만큼 핵무기에 반대하는 시카고 주민들의 의사가 견고했기 때문에 시의회 전쟁 중에서도 조례안이 통과될 수 있었던 것이다. 워싱턴 시장은 조례안이 통과된 후 “이 조례안보다 더 상징적인 것은 없다. 시카고가 원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경제다. 시카고가 핵무기를 금지한 미국 최초의 대도시가 됐다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이 조례안은 핵무기 설계와 생산, 보관, 운영을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평화전환위원회를 만들어 시청과 계약 관계에 있는 업체들이 핵무기 관련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지를 평가하도록 했다. 조례안은 또 단순히 법률을 만들고 공표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시민들의 의사를 수렴하고 조직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컸다. 시카고와 같은 주요 도시들의 반핵 움직임은 일정 부분 성과도 냈다는 평가도 있다. 즉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 당시 핵무기 강경론자로 이를 적극적으로 몰아부쳤던 대통령이었지만 퇴임할 때에는 평화를 사랑하는 비둘기가 됐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았는데 이런 변화에는 시카고와 같은 지방자치단체들이 핵무기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줄기차게 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라는 지적이다. 결국 핵무기프리존이라고 불리는 시카고의 조례안은 지금도 핵무기 해체와 평화를 바라는 시카고 주민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셈이다. (편집국) Nathan Park 기자시사분석 nathan 핵무기 금지법 핵무기 반대론자들 시카고 조례안